나의 씹덕 생활의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게임이다. 슈퍼패미컴이 나의 첫 콘솔이었는데 그때는 어려서 제대로 플레이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하는 걸 손가락 빨면서 구경하기만 했다. 슈퍼패미컴 게임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슈퍼마리오 RPG] 였다. 당시 영어로 정발되어서 무슨 스토리인지, 어떻게 게임을 진행해야되는지도 몰랐는데 그냥 거기에 나온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게 너무 좋았다. 나 대신 플레이하던 가족이 다른 게임을 하려고 하면 [슈퍼마리오 RPG] 해주면 안 되냐고 졸랐을 정도였으니까… 결국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먼지 쌓인 슈퍼패미컴을 다시 꺼내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해서 엔딩까지 봤다. 지금도 재밌게 한 RPG를 얘기하려고 하면 이게 먼저 생각난다.

잡몹 처리할 때 9999 데미지 뽑아내는 스킬 때문에 파티에 무조건 넣었던 지노. 사실 나무인형 주제에 간지가 넘쳐서 좋아했다.
나의 게임 라이프가 nn년이 되었다는 걸 얘기하려고 한 것뿐인데 서론이 길어졌다. 아무튼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게임 라이프 동안 기대작이 있으면 미리 예약구매를 하거나 적어도 하루이틀 전에 미리 사곤 했다. 올해는 기다렸던 작품이 딱 네 개가 있는데 첫 번째는 [모여봐요 동물의 숲], 두 번째는 [라스트 오브 어스 2], 세 번째는 [진 여신전생3] 리마스터, 마지막은 [사이버펑크 2077]였다. 그리고 네 가지 중 첫 번째 빼고는 모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스포를 밟고 쎄한 기분에 예구를 안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펑은 그 위처의 그 CDPR이었기 때문에 게임 발매 연기를 여러번 했지만 회사를 믿고 발매일 전날 구매를 했다. 사전 다운로드도 끝내고 다음날 겨우 업데이트를 받은 후에 플레이를 했는데… 휘몰아치는 버그의 향연에 암담해졌다. 나는 그래픽이 구린 것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스토리만 괜찮아도 어느정도 만족하는 사람인데 솔직히 사펑의 최적화와 게임 완성도는 선을 넘어도 많이 넘은 수준이었다. 잔버그는 생겨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성격이라 여태 게임을 할 때 버그 때문에 빡쳤던 적은 없는데 사펑은 할 때마다 사람을 열받게 만들었다.
버그가 한 두개가 아니라 여태 걸렸던 걸 다 나열하기도 어렵지만 제일 자주 발생했던 것들 위주로 얘기하자면, 우선 조니 시점으로 플레이할 때 화면 한 가운데에 반투명한 푸른 박스가 생겨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캐릭터가 젓가락, 담배 같은 걸 손에 쥐고 있으면 공중에 해당 오브젝트가 겹쳐서 나타났고 심지어 손에 기타를 붙이고 등장한 캐릭터도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캐릭터가 나한테 전화를 걸기도 했고, 전화가 두 사람에게 걸려와 동시에 말하는 버그도 있었다. 주인공이 머리에 뭔가 쓰고 있으면 거울을 볼 때 대머리로 나왔는데 나중에 몰입도가 제일 올라가는 엔딩에서도 대머리로 나왔다. 게임을 잘 하다가 갑자기 튕기면서 꺼지는 일도 몇 번 당해서 나중에는10분 정도 지날 때마다 끊임없이 수동저장을 했다. 제일 어이 없었던 건 프롤로그가 끝나고 까만 화면에 무슨 붉은 반점 같은 게 움직이는 형태로 나와서 아 연출인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중간에 병사를 다 없앴는데도 스토리 진행이 안 돼서 게임을 껐다가 다시 켰다. 근데 연출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멀쩡히 나왔다. 버그도 연출로 생각하게 만드는 갓겜이라니.
플레이타임 50시간을 찍을 때까지 버그 때문에 게임 재시작만 한 열 번은 한 것 같다. 그런데 쌍욕을 해가면서 게임을 끝까지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존나 재밌었기 때문이다. 메인 스토리도 마음에 들었고 특히 서브 퀘스트 구성이 좋았다. 반복 퀘스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로맨스가 가능한 캐릭터를 비롯한 주조연이 나오는 퀘스트들은 매력적이었다. V와 함께 투탑 주인공으로 볼 수 있는 조니의 사이드 퀘스트가 제일 좋았는데 중간에 연주를 하는 구간은 따로 세이브 파일을 만들었다. 퀘스트에서 연주하는 [A like supreme]은 진짜 띵곡이다.

라이브 공연을 하기 직전 모습. 진짜 사무라이는 일뽕 맞은 이름 빼고 다른 건 모두 전설이다.
스토리가 존재하는 로맨스 캐릭터는 여V에서 둘, 남V에서 둘 총 네 명이었는데 넷 다 좋았다. 사펑 발매 전에 로맨스 가능한 남캐를 하도 안 풀어서 사이버펑크라고 와꾸 이상한 남캐들 데려와서 옛다 로맨스 해라 하고 던져주는 거 아닌가 불안했는데 다행히 둘 다 만족스러웠다. 특히 여V로 가능한 리버는 얼굴 + 성격 + 목소리 (한국어 더빙 기준) 모두 완벽했다. 케리 때문에 남V로 플레이해서 리버랑 섹스를 못한 게 아쉬워서 버그 픽스 및 DLC가 나오면 2회차로는 여V를 할 예정이다.
로맨스 캐릭터가 아니라서 아쉬웠던 캐릭터는 빅터였다. 주변 인물들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V 걱정을 꾸준히 해준 건 빅터였다. 외상도 그냥 해주고. 빅터에게 미안해서 돈 생기자마자 제일 먼저 가서 돈을 갚았는데 그 돈도 진심으로 안 받으려고 했다. 그저 빛… 복서였던 과거도 궁금하고, 재키랑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궁금하고 아무튼 다 궁금하다. DLC에 추가 로맨스 캐릭터가 생긴다면 제발 빅터도 넣어줬으면 좋겠다. 만약 안 나온다면 모드를 기다리는 수밖에. 능력자 양덕 모더들 믿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꺼운 팔뚝에 주사 꽂는 게 왜 섹시해보이는 건지 CDPR은 빨리 DLC에서 해명 부탁드립니다.
케리 유로다인은 로맨스 가능 캐릭터 중에서는 스토리가 제일 별로이긴 했지만 외모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로맨스가 가능한 게임인 경우 보통 주인공을 여자로 설정하는데 케리 때문에 남자로 설정한 보람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조니 또래면 할배 나이일텐데 그렇게 핫한 외모라니. 역시 잘생긴 게 최고다. 그리고 퀘스트를 하다 보면 요트에서 케리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그 장면이 너무 좋았다. 그 노래에 꽂혀서 OST를 찾아봤는데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거라 오열했다.

락서타 할배 남V랑 오래오래 행복해야돼요…
노래 얘기가 나온 김에 OST 얘기를 하자면, Falcom 보고 음반제작사라고 하는 것처럼 이젠 CDPR도 이젠 게임 회사가 아니라 음반회사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사이버펑크 한정으로라면 게임보다 음악을 더 잘 만들었다. 정말로. 운전 조작감이 너무 구려서 웬만하면 빠른 이동을 사용했고, 가까운 거리면 이 악물고 뛰어다녔는데 운전할 때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였다. 저작권 옵션을 꺼서 아마 기존 가수들의 노래가 나오기도 했을텐데 게임과 어울리는 노래를 기가막히게 고른 선곡 능력은 칭찬해줄 만하다.
좋은 얘기를 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반쪽자리 게임인 건 맞다. 게임 덜 만든 거 들킬까봐 발매 전에 콘솔 쪽 최적화 문제는 숨기고 — 그렇다고 PC가 버그가 적은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적을 뿐이지 — 마케팅을 할 때 얘기했던 요소들은 대부분 구현이 안 되어 있고… 하지만 재밌다. 게임에 재미를 느끼는 건 취향의 영역이지만. 오픈월드 게임 제작사로 유명한 락스타 게임즈의 GTA, 레데리 시리즈는 사놓고 좀 하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만뒀는데 사펑은 처음부터 몰입도가 좋았다. 캐릭터 성격과 배경 설정도 잘 짜여져있고. 주인공과 엔딩까지 함께하는 조니 실버핸드는 무조건적인 조력자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그리고 한국 한정으로 풀더빙은 최고의 장점이다. 지나가는 글자들 읽기 급급해하는 게 아니라 자막을 끄고서도 온전히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엄청난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CDPR은 제발 빠른 시일 내로 버그를 잡아내고 적어도 버그 때문에 게임을 못한다는 소리는 안 나오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본인들이 구현할 거라고 했던 것까지 게임에 넣는 건 기대도 안 하지만 적어도 사후지원과 함께 DLC는 제대로 뽑아주길 기원한다.

마무리 사진은 처음 써본 포토모드. 이 퀘스트 덕분에 포토모드 있는지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