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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s

자물쇠가 잠긴 남자

스포일러 주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 가장 최근에 정발된 작품이라서 기대를 안고 읽었다. 제목에서 기시 유스케의 [열쇠가 잠긴 방]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건 밀실 추리소설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은 맞지만, 범인을 찾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베일에 쌓인 한 남자의 과거와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소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자물쇠가 잠긴 남자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남자를 표현하는 데에 이처럼 잘 어울리는 말은 또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이 남자가 떠오르는 제목. 드라마, 원작 소설 둘 다 꽤 재밌다.


    일반적으로 히무라와 아리스가와 콤비가 함께 나타나지만, 이 작품만큼은 중반까지 아리스가와 단독으로 사건을 조사한다. 물론 중간에 입시 시험으로 바쁜 히무라에게 전화를 걸어 큰 힌트를 얻긴 하지만 ‘나시다’라는 남자에게 숨겨진 과거를 알아내고 정리하는 건 오로지 아리스가와의 성과였다. 다른 작품에서는 늘 올바른 추리를 위한 엉터리 방향을 제시하는 조금 모자란 이미지로 나왔는데, 성실하게 용의자 및 증인의 대화를 듣고 추리를 해나가는 아리스는 신선했다. (그렇다고 이전의 작품에서 아리스가 하는 말마다 엉터리인 멍청이로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아리스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건 팬으로서는 좋았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입각해서 본다면 솔직히 이 작품은 아쉬웠다. 일단 나시다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 사건 현장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동기’에 집중하여 (이걸 '와이던잇'이라고 하려나?) 피해자의 과거를 되짚어갔기 때문에 이게 추리소설인지, 나시다라는 사람의 전기를 읽는 건지 헷갈릴 수준이었다. 중반까지 이런 분위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머리를 굴려서 범인을 맞추는 걸 좋아하는 추리소설 팬들에게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면에서는 이 작품을 과연 본격 추리 소설로 부를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후반부에 밝혀지는 범인의 동기가 너무 뜬금없었다. 이걸 이렇게 풀어낸다고? 싶은 수준. 피해자가 자살을 할 리가 없다는 이유는 2권을 통틀어 치밀하게 (사실 치밀하다기 보다는 세세하게가 맞는 것 같다.) 설명했으면서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이유는 소설에서 힌트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허무했다.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반전이 크게 유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중반부가 좀 늘어지고, 후반부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과 그 동기가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읽힌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아리스가와가 홀로 고군분투 하며 진상에 다가서는 열쇠를 얻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벽에 막혔을 때 나시다 씨의 영혼과 대화하는 상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때 쯤에는 입시를 마무리 짓고 아리스를 돕기 위해 히무라가 나타났다.

 

    이번 작품이 생각보다 평이 안 좋아서 걱정했고, 읽고 나서도 많이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나같은 아리스 빠순이 + 히무아리 처돌이는 읽지 않았다면 100% 후회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다시 봐도……
    나 혼자 이렇게 호사스러운 방을 쓰다니 아깝기 그지없다. 이곳은 부유한 가족이 묵는 곳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내 가난한 근성이 조금 싫었다.
    하다못해 비슷한 수준의 연인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방데 들어온다면 내 연인, 혹은 아내는 ‘와아!’ 하고 환성을 지르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을 위해 오늘은 조금 노력했어 어쩌고 하겠지. 출판사에서 예약해주었다는 설정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작가로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질 테니. 그리고 욕실도 이렇게 깔끔하네, 샴푸가 아유라 제품이야, 라고 하는 그녀의 들뜬 목소리에 미소를 짓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어 가족이 함께 왔다면 귀여운 아들이나 딸이 신나서 침대에서 폴짝거리거나 방안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다정하게 타이르겠지.
    어리석은 상상을 하고 있자니 방이 점점 넓게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체육관만큼 넓어질 것 같다.

    고오급 호텔 스위트 룸에 숙박하게 되면서 홀로 망상의 세계로 떠나는 아리스가 귀엽다. 소설가답게 상상력도 참 풍부하다. 여우같은 부인과 토끼같은 자식을 아리스가 상상할 때, 애석하게도 나는 아리스의 옆에 히무라가 담배를 피면서 스위트 룸에 대해 평가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미안, 아리스.

 

    “일찍 왔네. 기다리게 했군.”
    빈 의자에 코트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래서?” 하고 묻는다. 어떤 용건인지 전화로는 한마디도 묻지 않더니 궁금했던 모양이다.
    오늘의 부교수는 한겨울에 하등 쓸모없는 시원함을 연출하는 하얀 재킷에 차콜그레이 셔츠, 검은 코듀로이 바지. 이대로 고급 호텔 디너에 가도 괜찮을 듯하지만 얇은 넥타이를 평소처럼 느슨하게 매고 있는 건 글쎄. 지금 디너에 갈 건 아니니 상관없지만.
    나는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수염 자랐어, 라고 말없이 지적한 것이다. 히무라는 자기 턱을 만져보고 작은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면도를 깜빡한 거지, 바쁘다는 걸 티 내려고 그런 게 아니야.”
    얄미워서 말하지 않았지만 제법 잘 어울린다. 이 선생은 여성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여학생에게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추측건대 그녀들은 지성 밑에 숨은 야성적인 면을 감지했을 테니, 히무라가 다박수염을 기르고 교단에 서면 한층 호평을 얻을 것 같다.

    아리스가 생각하는 히무라는 인정하기 싫지만 잘생기고 똑똑한 내 친구, 정도인 것 같다. 그런 아리스도 주변에서는 외모가 나쁘지 않다는 평을 받는 것 같긴 한데. 가장 가까운 친구가 여러모로 잘나면 힘든 법이다. 그나저나 친구가 대놓고 여성을 싫어한다고 말할 정도면 대체 히무라는 평소에 얼마나 티를 내고 다니는 것인가.

 

    속박한다기보다 현실에 붙들어준다고 말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히무라는 프리랜서가 되어 스스로를 들판에 풀어놓으면 일종의 폭주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게 아닐까?
    히무라는 사냥꾼처럼 범죄자의 냄새를 추적해 법의 처벌을 받게 하려는 동기에 대해 과거에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한편, 언제 누구에게 어떤 살의를 품었는지는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은 것은 대학교 때로, 어떤 심각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거기까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태연히 말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다음은 털어놓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란 적이 있는 남자라는 인식을 주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는 철저히 숨긴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기는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정신이 거기서 일종의 균형점을 찾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십사 년이나 알고 지낸 친구지만 어딘가 연약한 구석도 있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또다른 ‘자물쇠가 잠긴 남자’에 대한 아리스의 생각. 그나저나 진짜 히무라가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리스가와 선생은 대체 언제쯤 이 떡밥을 풀어낼 것인가. 아니, 이 떡밥에 대해 설명해줄 생각이 있긴 한 걸까? 이러다 맥거핀으로 끝나는 거 아닌가 몰라.

 

    나는 여기서 가게우라 나미코에게 배운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경찰의 실수로 눈앞에서 완전범죄가 성립될지도 몰라. 히무라 히데오가 간과해도 될까?”
    “아주 내 하트에 불을 붙이네.”
    안 되겠다,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하다.
    …
    “현실을 직시하면 그렇게 되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투명한 범인에 의해 완전범죄가 성립되는 건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반복하지 마.”
    “와안저언⏤.”
    “쳇.”
    가게우라가 직접 전수해준 필살기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히무라는 뜨거운 정의감으로 완전범죄를 저지하려 한다기보다 그저 그것을 꾸미는 자를 증오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려 들지는 않지만 그 사악함이 과거 그의 안에 깃든 적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아, 여기에도 자물쇠 잠긴 남자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무라는 에이토 대학을 졸업하고 부교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사쿄 구 기타시라카와의 낡은 하숙집에서 살고 있다. 많았던 하숙생들은 그를 제외하고 다들 떠나 지금은 집주인 할머니와 둘이서 산다. 주워 와 기르는 고양이가 세 마리 있고, 하숙집과 호텔은 다르지만 체류 연수 십오 년은 나시다 미노루 저리 가라다.

    히무라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아는 아리스. 하트에 불을 붙이다는 표현은 반칙 아닌가? 너무 대놓고 표현하는 거 아닙니까, 히무라 선생님? (물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안다)

 

    자물쇠가 잠긴 또 다른 남자, 히무라 히데오를 떠올렸다. 언제 누구를 죽이고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불쑥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아리스는 히무라의 비밀이 정말 궁금하고, 또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 같다.

 

    “조심스레 여쭙겠는데, 히무라 선생은 언제쯤 출동할 수 있을 것 같아?”
    “입시가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가지.”
    마지막날이 언제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래. 입시가 끝나는 날에 올 거지?”
    “모레, 10일이야. 감독 업무가 끝나면 바로 허기를 채우고 긴세이 호텔에 들어갈 거야. 이미 예약했어.”
    “예약했다니…… 언제?”
    “너한테 연락하기 직전에. 오너가 받아서 자기소개도 미리 했어. 어찌나 감격하던지 가기 겁날 정도던데.”
    꽉 막힌 국면을 타파해줄 구세주로 보였으리라. 가게우라가 유별나게 소개한 탓도 있을 것 같다.

    아리스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바로 달려가는 히무라 선생… 이라고 하기엔 입시는 너무나도 중요했다.

 

    “마침내 히무라 선생님이 오시는군요. 아리스가와 씨 옆방 404호로 모실까 해요.”
    “방에 차이가 나네요.” 그걸로 불평할 남자는 아니지만.
    “저도 403호 정도로 바꿀까요?”
    “귀찮으실 텐데 지금 그대로가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넓은 방이 있어야 회의하시기도 편할 테고.”
    수사본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건 괜찮지만 내 방이니까 히무라가 흡연은 바로 환기하면 될 정도로 자제해주면 좋겠다.

    아리스도 히무라가 담배필 때 아주 가끔씩 뺏어 피던데, 담배 냄새는 또 싫어하나보다. 생각해보니 흡연자들도 담배냄새는 싫어했던 것 같다. 비흡연자의 입장에서는 필 때 맡는 거나, 다른 담배 냄새나 똑같아 보이는데.

 

    “아리스가와 씨와 동갑이라니 젊은 부교수님이시네요. 보나마나 우수하시겠지요?”
    미나에가 말했다. 치켜세워서 기대가 커지면 히무라도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본인 대신 겸손을 떨 상황도 아니다.
    “예, 뭐, 경찰의 신뢰도 두텁습니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요구 사항이 있으면 확실하게 말하는 타입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방이나 식사에 주의할 점은 있나요?”
    “딱히 없을 겁니다. 아아, 한 가지. 뜨거운 걸 못 마시니 커피는 미지근하게 내주셔도 됩니다.”

    세심한 아리스. 새삼스럽지만 히무라가 뜨거운 거 못 마시는 고양이 혀 속성 보유자라는 게 은근히 귀엽다. 고양이 애호가 다운 특성이랄까.

    “대학에서 바로 달려왔을 텐데 저녁은 먹었어?”
    “도중에 대충 때웠어. 네가 보낸 문자는 봤어. 상당히 전진, 아니 상승했어.”
    “그러면 다행인데. 천장에 머리를 쿵 부딪히고 막다른 곳이 나올까 봐……”
    “그럼 확 뚫고 천장 위로 나가면 되지. 머리 좀 박았다고 끝나는 건 아니야.”
    “오오, 연일 시험 감독 노릇으로 녹초가 됐을 줄 알았는데 왜 이리 팔팔해?”
    “네가 전화에 문자로 문제를 마구 보내는데 좀이 안 쑤시겠어?”
    “천생 탐정이야, 넌.”
    그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사건 해결을 향한 히무라의 열망은 사건의 경중에 상관없이 늘 뜨겁다. 사소한 사건이라도 항상 진중하게 대하는 모습이 좋다.

 

    시카우치가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블루종을 걸치고 일어나다 멈추었다. 그리고 부교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상한 질문이지만, 혹시 선생님은 사랑을 하고 계신가요?”
    히무라는 “허?”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니요. 그런 훈훈한 일과는 인연이 없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신가요. 그럼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굉장한 비밀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실례할게요.”
    어이없어하는 히무라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웠다.
    “뭐야, 저건?”
    “히무라 선생님은 아침 댓바람부터 유독 섹시하시네요, 그런 뜻이겠지. 만나자마자 그런 코멘트를 들을 수 있다니 대단한 매력남이네.”
    시카우치 마리카는 그 짧은 시간에 히무라로부터 비밀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직감이 날카로운 건지, 젊어도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건지, 둘 다인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니…… 내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걸 꿰뚫어 본 건가?”
    “훈훈한 일하고는 인연이 없는 주제에 뭐가 숨겨둔 자식이야. 비밀이라는 건 범죄에 끌리는 진짜 이유를 말하는 거 아니겠어? 네 과거는 내게 나시다 미노루 이상으로 수수께끼야.”
    “뛰어난 아리스가와 형사가 진심으로 조사하면 들켜버릴 것 같군. 그건 무사의 온정으로 눈감아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들에게 매력 어필을 한 인기남 히무라 부교수님.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히무라를 볼 때마다 아리스가 질투하는 모습이 귀엽다.

 

    쓰유구치는 팔걸이의자에 앉은 부교수를 보며 “히무라 선생님이 이렇게 멋진 분일 줄은 몰랐네요. 상상했던 것하고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대학 교수님으로 안 보여요.”
    “뭘로 보입니까?”
    쓰유구치는 본인의 질문에 장난스레 웃었다.
    “IT 기업 사장님이나, 직접 회사를 차려서 돈을 버는…… 앙…… 앙프레에디터인가 그런 거요.”
    “앙트레프레너 말씀이군요. 그런 재능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는 거죠. 민완 사업가로 정력적으로 일하고 정력적으로 노는 사람. 조금 나쁜 면도 있어서 여자를 농락하기도 하고.”
    나는 침실에서 가져온 의자에 앉아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 듣고 있었다.
    “실상과 거리가 있군요.”
    “사립대학 부교수는 꽤 많이 받는다면서요?” 방금 받은 명함을 보면서 묻는다. “취미는 뭐예요?”
    미팅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면 얼어붙을 게 확실하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살인범을 사냥하는 게 삶의 낙. 범죄 수사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지만 유일한 취미는 버림받은 고양이를 주워 와 키우는 일. 연봉은 모른다.
    “오늘은 부모님 댁에 가야 하지만 내일 밤은 비어 있으니 괜찮으면 신치 부근으로 한잔하러 갈까요? 아리스가와 씨도 함께.”
    아무래도 태도가 이상하다. 멋진 남자의 등장에(그런데 그정도로 멋진 남자인가, 이 녀석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심은 어떨까? 나시다의 죽음에 깊이 얽혀 있어 탐정 앞에서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는 걸지도 모른다.

    인기남 히무라 부교수님(2). 자기가 인기 있다는 걸 모르는 하하 유니버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철벽도 참 잘 친다. 그 와중에 아리스 또 질투하는 게 귀엽고. 쓰유구치는 진범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수사 상황을 떠보려고 접근한 거였겠지만 아마 히무라의 첫인상에 대한 소감은 진심이었을 것 같다. 범인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을지 몰라…

 

    “어제는 너한테 주정을 부린 것 같은데.”
    “그래, 부렸지. ‘히무라 히데오의 과거 따위, 내가 진지하게 조사하면 열흘이면 만천하에 다 드러나. 폭로당하기 싫으면 냉큼 네 입으로 불어’ 하고 눈앞에 집게손가락을 들이대던데. 너, 내 과거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설은 몇 개 있지만 이거다 싶은 게 없어. 친구가 입을 다물고 말해주지 않으니 일부러 풀 것까진 없나,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히무라는 신문을 무릎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것보다 아침이나 먹고 와. 안 그래도 늦었으니까.”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 답게 아리스를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공기가 따가워서 심장이 아렸다. 히무라는 범인을 반드시 경찰의 손에 넘기고 법정에도 찾아가지만, 사람을 죽이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게 그의 본심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가 가혹한 말을 내뱉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의미 없는 소리를 한다면 말려야 한다.
    하지만 자기 감정을 억제했는지,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히무라는 침묵했다. 쓰유구치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했지만 납보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질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과거가 있는 범죄학자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한 명만 죽이면 유기형 혹은 무기징역. 두 명을 죽이면 사형 가능성이 생기지만 대개는 그래도 세이프. 세 명 이상 죽이면 아웃. 그런 규칙이라니, 어이없잖아.
    그의 기준을 따른다면 쓰유구치 요시호는 교수대에 올라도 별수없지만, 사형 제도 자체에 대한 의문을 히무라처럼 선뜻 떨쳐버리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중한 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녀가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히무라가 참고인으로 출석하는 재판을 방청하러 갔다가 재판관들이 법정에 들어오는 순간, 이 사람들은 국가의 이름하에 피고인의 생명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인간 세상에 사형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모순은 인간 존재의 모순으로 본다면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용인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해도 남용되지 않도록 확실한 질서가 필요해 국가에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 국가가 끼어드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범한 사나이는 알지 못해 천벌의 부재를 한탄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자 무신론을 관철하는 히무라가 말했다.
    ⏤천벌이라고? 신이 가장 쓸모없어.

    범죄에 대한 히무라의 입장을 나타내는 장면. 본인이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럴까, 범죄, 특히 살인에 있어서 만큼은 그 어느때보다 냉정한 면모를 비춘다. 만에 하나 아리스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새삼 궁금하다. 그때도 살인범들에게 취했던 행동을 그대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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