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재독하게 된 [쌍두의 악마]. 집 근처 도서관에 있는 유일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책이었다. 아리스 시리즈는 책 발간일이 오래돼서 그런지 절판 된 작품이 많아 원래는 중고로 사려 했지만, [쌍두의 악마]는 새 책으로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한국어로 번역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책을 보려면 미약하게나마 책 판매량을 올려야 된다는 생각에 새 책으로 구매했다.
새 책을 구매하면서 리뷰를 겁색하다 알게된 건데 [쌍두의 악마]는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었다. 출연자가 누군가 봤더니 카가와 테루유키. 카가와 테루유키가 누구지? 했는데 검색해보니 일드를 안 본 지 오래된 나도 알고 있는 배우였다. 99.9에 나왔던 변호사 아저씨라니. 근데 젊었을 때랑 99.9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매치가 잘 안 된다. 메인에 있는 걸 보면 에가미 부장 역할 같은데, 소설 속 묘사된 "장발" 미남과는 거리가 멀다. 배우가 미남이 아니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진짜로.
쌍두의 악마 ~ 진범은 누구인가? ~ 일본은 부제 붙이는 걸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쌍두의 악마]는 아리스가와 책 중에서도 고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상도 많이 받았고, 본격 추리 소설의 대표작을 꼽을 때 종종 언급되는 것 같은데 나 역시 이에 대한 이견이 없다. 범인을 알고, 트릭도 어느정도 기억을 하는 상태에서 다시 읽었는데 에가미 지로가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나에겐 [쌍두의 악마]가 첫번째 학생 아리스 시리즈였는데,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아리스를 비롯하여 EMC 부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마리아가 어떤 일 때문에 상처를 받고 기사라 마을로 숨었는지 몰라서 얘는 왜 이러고 있는 건가 답답하게 생각했었다. (마리아가 부원들을 사건에 휘말리게 만든 민폐 캐릭터처럼 보였다.) 이전 작인 [외딴섬 퍼즐]을 읽고 다시 보니 마리아가 어떤 심정으로 행동한 건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역시 시리즈물은 순서대로 읽고 봐야 한다.
소설 속 서술 시점이 아리스와 마리아로 번갈아가면서 바뀌는 것도 신선했다. 그리고 서로 분리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사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에가미가 깨닫는 순간이 짜릿했다. (물론 나는 빡대가리라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감으로 때려맞추긴 했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쉬운 부분은 마리아랑 에가미가 한 팀이 된 탓에 아리스랑 에가미가 같이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점 뿐이었다. 이 부분은 후속작인 여왕국의 성에서 해결된다.
원래는 작가 아리스 쪽을 먼저 본 터라 이쪽에 대한 애정이 훨씬 컸는데,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라거나 캐릭터의 설정 쪽은 학생 아리스 쪽이 뛰어난 것 같다. 에가미의 슬픈 과거사 같은 부분도 그렇고. 히무라에게도 사람을 죽이고 싶던 적이 있어서 범죄학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배경이 있지만 이쪽은 이유가 밝혀질 기미가 없다. 히무라의 떡밥은 맥거핀에 그칠 것 같지만 에가미는 [여왕국의 성]에서도 그의 과거에 대해 얕게나마 다뤄졌다. 학생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이제 장편은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는데, 과연 거기에서 떡밥들이 해소될 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에가미가 과거의 굴레에서 부디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모습을 보다가 동심을 되찾았는지, 장로 에가미 선배도 일어서서 높은 쪽 철봉에 오른쪽 다리를 걸었다. 그리고 장발을 땅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늘어뜨리고 몇 번 회전했다.
“자, 이제 슬슬 부장의 대회전이 나온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
모치즈키가 부축하자 에가미 선배는 한 번 착지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양어깨를 돌렸다. 정말 도전하려나 보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이렇게 장난에 끼어들 때마다 귀엽다.
“이상해…… 연결이 안 되는군.”
“0번을 먼저 돌렸어요?”
난처한 표정을 짓는 부장에게 아이하라가 물었다. 에가미 선배는 헛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0번을 돌린 후 다시 전화번호를 돌렸다.
“안 어울리게 긴장 좀 하지 마요.”
오다가 한숨을 쉰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이렇게 긴장하면 귀엽다.
‘마리아, 알고 있어? 노부나가는 중3 때 처음 읽기 전까지, 오 헨리가 중국인인 줄 알았대.’
‘난 완벽하게 착각했었어.’
노부나가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ㅇㅇㅇ’라고 썼다.
나는 한 손으로 운동복 자락을 쥐고 로고를 보았다. 또 에가미 선배와 아리스, 모치 선배와 오다 선배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제 곧 돌아갈게요.”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뭔가가 창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본 나는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세면도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떻게……”
자물쇠가 열린 창문을 밀어젖히고 빗속에 선 인물이 내 이름을 불렀다.
“잘 있었어, 마리아?”
에가미 선배였다.
무슨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처럼 빗속에서 멋지게 등장하는 에가미 선배.
“나중에 찬찬히 설명할게. 지금은 못해. 그렇다고 마리아나 내가 사고를 당한 건 아니니까 걱정은 마.”
나는 슬슬 안달이 났다. 에가미 선배까지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정도 설명해주지 않는데 걱정하지 말란다고 안심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줄 수는 없나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게. 날 믿고 맡겨줘.”
그렇게까지 말하니 별 수 없었다. 내가 에가미 선배 이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알았어요. 마리아가 있으면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희미하게 에가미 선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부장이 혀를 차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지금 옆에 없어. 내가 깜빡했다. 불렀어야 했는데.”
“어째서 제게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거죠?”
무심코 그런 소리를 하고 말았다.
“눈치 없는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용서했으면 기다려줘. 부탁이다.”
에가미 선배도 초조한 기색이었다. 부탁이다? 보통일이 아니다.
눈치가 없는 건 에가미가 아니라 아리스다. 부장한테 얶떢계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
꿈을 하나 꾸었다.
실제로는 집에서 통학하는 아리스의 하숙집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아리스의 고백을 듣는다.
‘추리작가가 되고 싶어.’
아리스는 ‘임상범죄학자’라는 직함을 가진 탐정이 등장하는 자신의 작품을 내게 보여주었다. 실은 이 부분은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학생 아리스는 히무라가 주인공이 작품을 쓰고, 작가 아리스는 학생 아리스가 등장하는 작품을 쓴다. 아리스 시리즈 속에는 다른 아리스가 있고 다른 아리스에는 반대편 아리스가 있고... 호접지몽?
“어머니는 어떤 점술에 광신적으로 빠져 있었어. 위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계시를 남겼지. ‘너는 서른을 맞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다. 아마도, 학생인 채로.’”
나는 망설였다. 뭐라고 대답하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까? 웃는 표정을 지을까?
“에가미 선배는 같은 거 믿지 않는 타입이죠?”
그 말밖에 못했다. 부장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렇다면 서른까지 학생으로 있어주마, 하는 사고방식은…… 어떨까.”
“……”
“형이 열아홉에 죽었어. 어머니는 형에게 ‘스무 살까지 살지 못할 아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정신 나간 어머니였어.”
“아버님은…… 미야즈에서 뭘 하고 계세요?”
나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남 밑에서 일하고 있겠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
책상 위로 깍지를 낀 부장의 손 위에 재가 툭 떨어졌다.
힘들었던 과거였을텐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얘기하는 에가미의 모습이 슬프다. 아마 마리아를 배려해서 그런 거겠지만... 그런 부분까지 에가미의 다정함이 느껴졌다.
“나는 자야겠다. 사실 어제 한숨도 못 잤거든. 생각할 게 많아서.”
“사건 생각 때문에요?”
“아니, 형의 기일이었어.”
에가미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 첫째 단에 발을 올렸다.
“점술 같은 건 안 믿죠?”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물었다. 부장은 발길을 멈추지 않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 안 믿어. 핵전쟁으로 인류가 전멸해도 나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되어 살아남을 생각이니까.”
나는 계단 밑에서 거듭 말했다.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일곱 살 차이 나는 에가미 선배가 같은 시기에 에이토 대학에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에가미 선배에게서 돌아온 말은, 내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고마워.”
처음은 분명 어머니에 대한 오기로 졸업을 미룬 채 학생으로 남아있는 거였겠지만, EMC 부원들을 만나면서 에가미도 에이토 대학에 가길 잘 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마리아나 다른 부원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Review >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0) | 2020.10.31 |
---|---|
자물쇠가 잠긴 남자 (0) | 2020.10.16 |
여왕국의 성 (0) | 2020.10.16 |
외딴섬 퍼즐 (0) | 2020.10.16 |
월광게임 ~ Y의 비극 ’88 (0) | 2020.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