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책을 읽은 직후 리뷰를 작성해야 했는데, 완독한 지 1개월이 지난 후에서야 리뷰를 쓴다. 국내에 정발된 학생 아리스 시리즈 중 마지막 시리즈여서 아까운 마음에 아껴서 봤는데, 다 읽고 나니 굳이 아껴서 볼 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즈드 서클 추리 소설 같은 경우 배경 설정이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폭설로 인해 산장에 갇힌다거나, 다리가 끊어져서 고립된다거나, 태풍으로 인해 섬에서 나가지 못한다거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만 봐도 [외딴섬퍼즐]이나 [쌍두의 악마]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하는 클리셰 범벅인 배경이 많은데, [여왕국의 성]은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사이비(?) 종교 단체의 건물이 배경이라니. 현실성, 개연성은 둘째 치고 신선함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 폭발로 인한 클로즈드 서클도 충격적이었는데 말이다.
이번엔 사라진 에가미 부장을 찾기 위해 EMC가 나서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정작 에가미는 졸업 논문 때문에 떠난 거였다고 태연하게 대답해서 웃겼다. 소설 최후반부에서는 그 이유가 아니었다는 게 나오지만, 아마 졸업 논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에가미가 똑똑하고 여러가지 능력이 좋은 건 많지만 대학교 졸업 후 취업시장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냉정하니까... 그래도 그 시절엔 괜찮지 않았니 에가미? 2020년은 헬이야.
범인 맞추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지만 정작 나는 소설 후반부에 들어선 후에야 범인을 눈치챘다.) 범인의 동기도 충분히 이해가 갔는데, 에가미의 과거와 유사해서 씁쓸했다.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한 명은 저주에 맞서겠다는 결심을 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저주를 대한 반면, 다른 한 명은 자신에게 내려진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사실 에가미가 자신에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완벽히 극복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원망하며 범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UFO 설명이나 SF 관련 지식이 나올 때는 좀 지루했지만 (심지어 내가 관심이 없는 분야도 아닌데...) 그래도 EMC 멤버들이 사이비 종교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탈출 계획을 짜고 난동을 부리는 장면은 재밌었다. 오다가 마리아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데 무슨 액션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아리스, 에가미 등 주인공에게 비중이 쏠리는데 이 소설에선 선배 두 명도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이 좋았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다른 작품도 빨리 정발이 됐으면 좋겠다. 제발... 신간 나오면 새 책으로 살테니 제발 발간해주세요. 출판사 여러분. 저는 아직 에가미와 아리스의 케미 터지는 장면들을 많이 보고 싶어요...
월요일부터 캠퍼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에가미 선배가 마음에 걸려 예비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도 알겠다, 니시진에 있는 하숙집을 찾아가보았더니 가마쿠라에 갔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흔적이 있었다. UFO를 탄 구세주가 찾아온다고 믿는 수상한 교단의 성지다. 늘 지갑이 얄팍한 에가미 선배가 호기심에 찾아가기는 너무 멀다. 남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둬도 언젠가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어서 상황을 살피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리스는 어째서 에가미 선배의 예비 열쇠 장소를 알고 있었을까? ㅎ 그나저나 '늘 지갑이 얄팍한 에가미 선배'라니. EMC 후배들의 에가미 취급의 상태가...?
“12만 엔!” 마리아는 모치즈키 두 어깨를 붙잡고 뒤흔들 기세로 험악하게 따졌다. “모치 선배, 이상하잖아요! 혼자서 명상하는 거라면 자기 방에서도 할 수 있는데, 에가미 선배가 그러겠다고 12만 엔이나 되는 거금을 낼 것 같아요? 내고 자시고,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걸 알잖아요. 명상이라니, 말도 안 돼요!”
에가미 취급의 상태가...? (2)
나는 동쪽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동화 속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다. 고성에 유폐된 공주님을 구하러 찾아온 네 명의 기사라는 설정은 에가미 선배와 마리아가 뒤바뀌지 않으면 좀 그런가?
에가미 공주님이라니. 잘 어울린다. 이렇게 박력넘치는 공주님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모치즈키가 웃으며 말하자 선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미안.”
우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걱정했지, 미안해.”
대뜸 사과부터 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미안해하는 에가미 선배를 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생각하는 에가미는 이런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 그나저나 EMC 애들은 에가미를 본 날이 얼만데 진지하게 미안해한다고 깜짝 놀라냐. 그리고 에가미 취급의 상태가...? (3) ㅠㅠ
“관찰…… 체험이라니…… 에가미 선배, 정말 인류협회를 연구하려고 온 거예요? 진짜로?”
부장이 깊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피로가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진짜, 진짜로 그게 목적이었어. 그렇게 이상해? 나도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지. 어차피 내년이면 대학에서 쫓겨날 텐데, 기분 좋게 나가야 하지 않겠어? 너는 잘 되어가?”
“신흥종교 총본부에 잠입해 관찰과 신앙 체험이라고요? 그걸로 졸업논문을 쓰겠다고요? 설마요, 사회학부 학생도 아니고.”
졸업 논문 때문에 왔다는 말은 진짜 최소 10% 정도는 진실이었을 거다. 에가미가 관심을 가질만 한 관심사이기도 하고.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걸려도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아오타 씨는 제 후배들에게 ‘하늘의 배’에 대해 열렬한 강의를 해주고 있습니다.”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이곳에는 왜? 당신 행동은 역시 이상해요.”
“피차일반이라는 말밖에 못 하겠군요. 성스러운 동굴을 견학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아라키 씨에게 쓰바키 씨가 장단을 맞춰줄 수는 있어도, 우리 아리스가와가 그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적당히 눈치를 봐서 ‘실례합니다’ 하고 빠져나왔을 테니까요.”
역시 모르는 게 없다.
아리스가와 말처럼 역시 모르는 게 없는 에가미 부장. 근데 호칭을 ‘우리’ 아리스가와라고 하는 데에서 발렸다. '우리' 아리스가와래 부장님이... 웅성웅성👥
“정면충돌은 두렵지 않습니다.”
“위풍당당하네.” 날뛰는 북, 스키점프 최고 기록. “사실 따져보면 내가 이런 곳에 온 게 시초야. 손가락 하나라도 너희를 다치게 할 수는 없어.
…
“에가미 선배가 여기에 온 목적, 저희가 물었던가요?”
“물었잖아. 몇 번이나 말했어.”
“졸업논문 자료 수집. .그 말은 사실이죠?”
“그래. 나하고 졸업논문이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는가보네.”
“그런 건 아닌데. 졸업한 다음에는 어쩌실 거예요?”
“글쎄. 너보다 한발 먼저 소설가나 되어볼까?”
부장은 [적사관 살인사건]이라는 대작 미스터리를 쓰고 있다. 하지만 한 줄도 보여준 적이 없어, 우리 부원들은 허풍이 아닐까 슬슬 의심하고 있다.
“소설가요?”
“소설가나, 라는 표현은 오만한가. 작가 지망생인 네게 결례를 범했구나. 글쓰기처럼 끈기가 필요한 일은 내게 어울리지 않고.”
꼭 그렇지도 않다. 에가미 지로라는 사람은 몹시 유연한 인상을 가진 한편, 끝을 알 수 없는 강인함도 지녔다. 잔혹하리만치 단조로운 작업을, 태연한 얼굴로 끝없이 지속할 수 있는 강함이다. 내게는 둘 다 없다.
…
“어딘가 자리를 잡으면 너희에게 편지를 써야지. 우표에 낯선 글자가 찍혀 있는 편지야. 봉투를 뜯으면 모래알이 몇 개 떨어지겠지.”
“우와, 시인이네요. 어디에 가도 상관없지만, 하다못해 10년에 한 번 꼴로는 귀국해주세요. 다 함께 모여 동창회를 열 수 있도록. 어때요?”
“좋아. 다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와. 점점 일본어가 어설퍼지겠지만 그 점은 눈감아줘. 대신 낯선 말로 인사를 해주지.”
“설레는데요. 수염도 길러주세요, 수염.”
시시한 농담이었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놓였다. 에가미 선배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학생인 채로 죽는다는 예언에 얽매여왔다. 그런 사람이 몇 십 년 후의 일을 기약해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장난에 관대한 한밤중이라는 시간이 그의 입을 가볍게 만들었다고 해도.
하지만…… 내가 ‘졸업한 다음에는 어쩌실 거예요?’ 라고 물은 것은 ‘뭘 하실 거예요?’ 라는 의미지, ‘어디에 가실 거예요?’라는 의미는 아니다. 에가미 선배는 답을 얼버무린 것이다.
아리스가 생각하는 에가미에 대한 이미지는 강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정도인 것 같다. 친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얘기해주지 않는 그런 사람. 에가미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얘기해서 그걸 옮기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아리스나 다른 부원들은 에가미가 자신들에게 모든 걸 얘기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아리스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할 거 같다.
막다른 곳이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 앞뜰로 통하는 출입구가 벌컥 열렸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할 광경이 튀어나왔다. 오토바이에 올라탄 오다였다. .성난 말처럼 바닥을 박차는 머신을 필사적으로 조종해, 오른발로 바닥을 걷어차면서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리아, 비켜!”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통틀어 오다가 가장 멋있었던 순간 ㅋㅋ
‘이제 끝났어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요……? 에가미 선배……?’
“어?”
아리스의 목소리다. 환청인가 싶어 도리질을 쳤다. 그래도 들린다.
‘어디까지 다녀왔어요? 실험이 너무 철저한데요.’
‘외로웠어? 여기서 2분쯤 떨어진 곳에서 간신히 들을 수 있었어.’
외로웠어? 하고 묻는 에가미 선배가 다정해서 쥬금. 드라마는 작가 아리스 얘기이긴 하지만, 사이토 타쿠미랑 쿠보타 마사타카의 얼굴로 왠지 모르게 상상된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나도 그랬다. 예언에 휘둘려 가족이 무너진 사람은 스포일러 말고도 또 있다. 비슷한 경우를 나와 가까운 사람도 겪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 에가미 선배의 옆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 눈은 그저 쓸쓸하기만 했다. 뭔가 말을 건네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탐정은 고통을 감내하고 범인을 찾아낸 것이다.
…
“그나저나 에가미 씨는 대단하네. 추리력뿐만 아니라 직감도 뛰어나. 내가 충전한 어두운 힘까지 꿰뚫어봤으니. ‘지금밖에 없다’고 자백을 유도한 건 짜릿했어. 확실히 이건 이렇게 복수했다는 선언이 필요한 범죄니까.”
스포일러는 에가미 선배가 흘리는 피를 보지 못한다. 탐정은 그저 침묵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범인을 찾아낸 에가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아마 EMC 부원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머리 긴 오빠는?”
치즈루는 에가미 선배에게 호감을 품은 듯했다. 부장이 안아서 의무실로 데려다주었을 때 아련한 연심이라도 싹튼 걸까? 이름을 알면서도 쑥스러워서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인 이 오빠 눈에는 다 보인다.
“1시 반까지는 돌아온다고 했는데.” 나는 벽시계를 보며 말했다. “딱 30분이네. 슬슬 돌아올 거야.”
다 함께 UFO 만주를 먹고 있자니 부장도 곧 돌아왔다. 울타리 너머로 에가미 선배가 나타나자 치즈루가 치맛자락을 쥐고 생긋 웃었다.
애기들도 홀릴 정도면 에가미는 시리즈 내 공인 미남인 게 확실하다.
이야기 상대는 ‘영감님’이었다. 가미쿠라를 취재하던 이시구로 미사오가 찍은 ‘여왕님’ 사진의 한 귀퉁이에 찍힌 남자. 그 남자를 보고 어느 인물을 떠올린 이시구로는 에가미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길이 엇갈려 부장은 사진을 받기 전에 가미쿠라로 떠났지만. 우리는 에가미 선배의 가족사진을 본 적이 없지만, 이시구로는 우연한 기회에 보았던 것이다.
에가미 선배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죽음을 예언한 아내와 사이가 멀어져, 장남이 요절하자 넋이 나가 이윽고 차남에 대한 애정도 잃고 말았다. 어머니는 병사했고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 부장이 언젠가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했다는데……
“이것저것. 가족이라는 걸 확인하고 왔어.”
다행이다. 축복하고 싶다. 어떻게 지내는지 몰래 보러 갔을 정도니 가족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버님 성함은 에가미가……?”
만약 그랬다면 부장이 이름을 밝혔을 때 협회도 사정을 눈치챘을 것이다.
“성이 바뀐 이유는 말하기 싫은 눈치였어. 인류협회에 들어간 경위도. 무슨 낙이 있는지 조금 더 거기서 신세를 지겠다는 군. 그것도. ‘영감님’ 마음이지.”
“화해는 못 한 거예요?”
부장은 조심스럽게 묻는 오다에게 고개를 저었다.
“악수하고 헤어졌어.”
부장은 가네이시 가족과 아키코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찾았을 때 에가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실 조금은 기대했을 거 같은데… 안쓰럽기 그지없다.
'Review >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0) | 2020.10.31 |
---|---|
자물쇠가 잠긴 남자 (0) | 2020.10.16 |
쌍두의 악마 (0) | 2020.10.16 |
외딴섬 퍼즐 (0) | 2020.10.16 |
월광게임 ~ Y의 비극 ’88 (0) | 2020.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