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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s

우부메의 여름

 

 

    밀리의 서재를 구독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구독하게 만든 이유는 바로 [교고쿠도 시리즈] 때문이었다. 나온 지도 오래된 책이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든 시리즈인 탓에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는데 아무런 기대 없이 “교고쿠”라는 단어를 검색하자 교고쿠도 시리즈가 짠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지금까지 번역된 책들이 모두 등록되어 있어서 그날로 바로 구독을 시작하고 교고쿠도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다른 구독서비스에 밀려 구독을 취소했지만 말이다.

 

    교고쿠도 시리즈를 처음 마주했을 때 든 생각은 “이게 무슨 개소리지?” 였다. 장광설이 심해서 입문 장벽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웬만한 잡지식을 얕게나마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특히 오컬트나 요괴, 귀신 쪽은) 나도 도통 이해가 안 가 도입부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마저도 나중에는 결국 포기하고 적당히 넘기다가 사건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일본 요괴, 귀신과 관련된 괴담 쪽은 들어본 적이 없어 낯선 데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종교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등 온갖 분야들이 섞이기 시작하니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비문학을 읽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주인공 세키구치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추젠지가 늘어놓는 장광설과 악담 앞에서 쩔쩔 매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애니화 된 교고쿠도 시리즈 속 추젠지 아키히코. 이런 얼굴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상상해도 버틸 수 없다.

 

    전자책으로 읽는 탓에 내용에 집중하는 것도 어려워 때려쳐야 하나 고민할 때 쯤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벽이 나타났다. 세키구치의 인물상이었다. 나는 적당히 찌질하고, 소심한 주인공은 싫기보다 오히려 대환영인 쪽이다. 완벽한 인물보다 결점이 있고, 약점이 있을 때 입체적인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키구치는 정신적으로 약하고, 남들보다 예민한 심성을 지녔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하지 말라는 행동은 다 하고 다니고, 여자주인공(이름을 까먹었다)에게 집착하는 등 세키구치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해결됐을 일이었는데, 싶은 부분이 한 두개가 아니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사이다를 찾게 되는 행동을 해서 너무 답답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비범해서 그런 성격이 더 눈에 띈 걸 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우부메의 여름]은 추리소설이라고 보는 건 어려울 수도 있지만, 훌륭한 괴기소설으로는 볼 수 있다. 중점적인 소재는 요괴, 귀신이고 추젠지 역시 신주이며 음양사 노릇을 하는 서점 주인이지만, 직접적인 의식을 통한 제령이 아니라 논리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불가사의한 일, 또는 요괴의 짓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걷어내는 과정이 좋았다.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조성해놓고 마무리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해결하는 음양사 탐정이라니. 캐릭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짠 것 같다.

 

    결말까지 다 읽고 나니 뒷맛이 좋지는 않았다. 역시 귀신이든 요괴든 무서워봤자 인간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한다. 인간이 모든 일을 저질러 놨으면서 요괴의 짓이라고 믿어버리는 건 우리가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언덕길 중간에 언뜻언뜻 불빛이 반짝였다. 기바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흠. 산에서 귀신이 내려오는군.”
    어두운 땅에 별무늬가 나타났다. 세이메이 문장이다. 그 등롱이다.
    비 때문에 부옇게 흐려 보이는 현기증 언덕에, 이상한 차림의 남자가 나타났다. 종이우산. 먹으로 물들인 듯한 새까만 기모노. 얇고 검은 하오리에는 역시 세이메이 문장이 물들여져 있다. 손에는 손등을 덮는 작업용 장갑. 검은 버선에 검은 게다. 신발코만 붉다.
    교고쿠도다.
    교고쿠도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이제야 언덕길을 내려온 것이다.
    친구의 눈언저리에는 분장이라도 한 듯 그늘이 생겨 있고, 꽤 야위어 보였다.
    이것이 이 남자가 가진 또 하나의 얼굴인 것이다.

    인상깊었던 교고쿠도의 등장.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것 같은데, 어떻게 연출했는지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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