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리뷰 블로그에서 좋은 평을 받았길래 위시리스트에 올려두었던 책이다. 기적이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트릭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 하는 탐정이라니.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내용이라 얼마나 재미가 있을지 기대를 하며 책장을 펼쳤다.
그런데 첫 장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첫 장면부터 중국인이 등장하고, 중국어가 계속 튀어나왔다. 소설이니까 중국 마피아 출신 캐릭터를 사용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넘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인공 우에오로 조의 외모 묘사. 빨간 코트를 고집하는 파란 머리에 오드아이를 지닌 미청년. 내가 지금 추리소설을 읽는 건지 라이트 노벨을 읽는 건지 알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래,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설정을 할 수 있지. 스스로 납득하며 다시 넘어갔다.
나는 스스로를 열린 마음을 지닌 씹덕이라 생각한다. (취향이 까다로운 게 문제일 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만화처럼 말도 안 되는 설정을 가지고 나와도 설득력이 있으면 재밌게 읽은 적이 많다. 그런데 유독 이 소설은 그게 잘 안 됐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설정도 만화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흥미로운 트릭을 설명하고 주인공이 그에 대한 반론을 매우 논리적으로 펼치는데도 도무지 눈에 잘 안 들어왔다. 논리 싸움을 하는 캐릭터들이 한 명은 파란 머리에 오드아이, 다른 한 명은 하얀 모피를 걸친 중국 마피아 조직원이라고 생각을 하니 자꾸 몰입이 깨졌다. 결국 후반부에서 주인공의 과거와 그의 적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쯤엔 그냥 포기하고 반쯤 흐린 눈을 한 채 결말까지 읽었다.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나...?
순전히 취향의 문제인 캐릭터 설정을 받아들이지 못 해 나쁜 말만 잔뜩 쓴 거 같지만, “기적 존재의 증명”을 위해 트릭을 논리적으로 논파해나가는 설정이 나쁘진 않았다. 셜록 홈즈의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 라는 명대사에 기반하여 제시되는 트릭을 반박하는 주인공의 말솜씨를 구경하는 게 꽤 재밌다. 정석 추리소설의 흐름이 지겨운 사람이라면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후카미 레이치로가 쓴 [미스테리 아레나]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추리 소설의 클리셰를 비틀고 서술트릭을 이용하여 독자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호불호가 꽤 갈리는 소설인데, 나에게는 “불호”였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정통 미스테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사실 아리스 시리즈를 읽을 땐 “너무 평이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곧잘 했었다. [미스테리 아레나]를 읽은 후에도 그저 이 책이 내 취향에 안 맞는 것 뿐이지 다른 참신한 추리소설은 또 다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를 읽고 나니 아무래도 “참신한”, “클리셰를 깨는” 추리 소설은 당분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고전 혹은 정통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지겨워질 때 쯤에나 다시 도전해야겠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스트레스 받는 세상이다. 가끔 기르는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심적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존나 센 여캐가 어딘가 나사 빠진 남주를 고양이 취급하는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비록 속은 변변치 못한 탐정도 겉보기에는 푸른 눈과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미청년이다. 인형처럼 또렷한 이목구비와 남자치고는 과분할 만큼 비단같이 고운 살결과 늘씬한 몸매. 거기에 오른쪽은 비취색, 왼쪽은 청록색의 오드아이까지. 실로 독특한 분위기에 보고 있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질 정도다.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손님을 끄는 판다 역할을 할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 이 탐정은 머리카락을 파랗게 물들이고 손에는 흰 장갑, 몸에는 설날 복주머니처럼 붉디붉은 웃옷을 항상 걸치고 있다. 붉은색을 행운의 색으로 보는 중국인의 색채 감각에서 보면 그저 복스러울 따름이다.
외모 묘사가 너무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이라서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뭔가 판타지에서만 나올 것 같은 묘사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