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와 단편 소설집. 읽은 지 얼마 안 됐는데 그새 내용을 까먹었다. 분명 읽을 땐 재밌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자세한 내용이 생각이 잘 안 난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긴 했지만 추리소설의 완성도로 따지면 미묘했다.
[호텔 라플레시아]는 히무라와 아리스가 휴양지로 떠나 한숨 돌리는 모습을 그린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소설 속 분위기도 잔잔하면서 불안감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데, 마지막 반전을 위한 장치 같았다.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단편은 아니었지만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읽었다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리스가와 시리즈를 읽는 이유는 추리소설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히무아리 콤비를 보려는 목적이 더 크기 때문에 큰 결점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리고 [201호실의 재난]은 드라마에서도 아주 짧게 나왔던 에피소드였는데, 이것도 추리소설로서의 퀄리티가 좋다기보단 히무라가 술 취해서 방을 잘못 찾아갔다가 사건에 휘말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완벽할 것 같던 부교수님에게 이런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니.
역시 정리하고 보니 추리소설로는 별론데, 히무라랑 아리스의 뒷얘기(?)를 본다는 의미로는 흡족한 소설이었다. 나는 왜 추리소설을 라이트노벨 읽듯이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읽고 있는 것인가…
“이대로 키타시로카와까지 태워다 줄게. 지금 시간에 오사카로 가도 막차는 끊겼을 테니. 내가 말려든 사건에 널 끌어들여서 이런 먼 곳까지 끌고 왔으니 말이야.”
“아, 고마워.” 히무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역시 프리랜서 친구는 두고 볼 일이야. 주재소에서 준 튀김덮밥 가지고는 모자라서 어디들러 라면이라도 먹을까 했거든.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안 되지. 내가 쏠게.”
고등학생도 아니고 서른넷이나 먹어서 라면 한 그릇 가지고 ‘내가 쏠게.’라는 표현은 자제해 주길.
하지만 라면이라는 말이 식욕을 자극했다.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 그릇을 어디서 먹을까. 나는 기억 속에 저장해둔 ‘국도변 맛집’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태워주는 거에 신나서 라면을 쏜다는 부교수님이 귀엽다. 아리스는 타박하면서도 같이 먹으러가고.
“녀석은 그런 게임에 별 관심 없을 거예요. 남국의 리조트 호텔과 히무라라. 바다가 어울리는 녀석은 아닌데.”
“히무라 교수님 과 바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럼 산이 어울릴까요?”
“산보다는 절벽이나 계곡이죠.”
…
듣자하니, 히무라는 논문 구상이 잘 되지 않았던 참이라 집을 떠나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되도록 멀리 떠나고 싶었어. 그래서 목적지가 이시가키 섬이든 유빙이 녹기 시작한 아바시리든 상관없었지.” 아마 본심이리라. 학술논문과 소설은 다르겠지만, 도저히 원고가 써지지 않을 때는 나도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니까.
절벽이나 계곡이 어울리는 남자, 히무라 히데오. 라이헨바흐 폭포의 셜록홈즈와 모리아티가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근데 히무라는 셜록보다는 왠지 모리아티 교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비록 정의감은 셜록과 비슷하지만, 풍기는 이미지나 분위기 때문일까.
음식이 나오자 카타기리가 하나씩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히무라는 잠을 푹 자서 허기가 졌는지 묵묵히 눈앞의 접시를 비웠다.
“꼭 학교에서 운동하고 집에 오는 길에 군것질하는 고등학생 같네.” 내가 농을 던졌다. “먹고 바로 자는 거 아냐?”
“먹고 나면 일을 시작해야지. 업무용 도구도 챙겨 왔어.”
업무용 도구란 노트북 컴퓨터와 필드 노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설마 풀 사이드에서 트로피컬 드링크를 마시며 자판을 두드리려는 건 아니겠지? 짜증나니까 그런 짓만은 하지 말아줘.”
“그게 짜증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리조트에서 그런 꼴사나운 짓은 안 해.”
일과 사건 해결에 그 누구보다 진지하지만 기본 상식은 갖추고 계신 히무라 선생.
“멍청이라니. 닥터 코레에다 붕대 남자 설은 네가 먼저 꺼냈잖아.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설명하라고.”
“책임은 무슨 책임. 추리작가 선생을 놀리려고 농담한 거야.”
어이가 없었다. 지기 싫으니까 괜히 오기를 피우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성한 필드워크 중에 진지하지 못하긴.
“듣고보니 짜증나네. 감히 추리작가를 놀림감으로 삼아?”
“그건 아냐. 난 전 세계의 추리작가 선생들을 놀린 게 아니거든.”
아리스 놀리는 건 아마 히무라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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