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와 게임으로 뇌가 퇴화하는 기분이 들어 오랜만에 책을 꺼내 들었다. 텍스트를 읽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엉망진창이 된 어휘력과 독해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선택한 책이 결국 추리소설인 걸 보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다른 선택지로 책을 고른 것 같지만, 어쨌든 독서라는 행위가 모니터를 쳐다보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자기합리화를 했다.
[별 내리는 산장의 살인]은 클로즈드 서클을 다룬 본격 미스터리다. 본격 미스터리라고 나온 추리소설을 몇 번 읽어봤지만 이 책만큼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은 처음이었다. 챕터별 서두에서 작가는 독자를 향한 힌트들을 아낌없이 던져준다. 그래서 숨겨진 복선은 어떤 걸지, 평면도가 왜 중요한지 등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름대로 추리를 할 수 있었다. 책을 끝까지 다 읽은 후에는 이건 친절함을 가장한 작가의 함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눈으로 인해 고립된 장소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만큼 이야기는 큰 굴곡 없이 (살인 사건을 큰 굴곡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지만) 흘러간다. 큰 사건이라거나 복잡한 트릭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군더더기 없다. 소설에서 제공하는 정보만으로 독자들이 충분히 범인을 추리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이번에도 난 중반까지는 어떻게 추리를 해보려고 하다가 결국 흐름에 뇌를 맡겨버렸지만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최후반부에서는 반전과 함께 여러 의미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데 이 정도면 클로즈드 서클 + 본격 미스테리라는 장르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작가와 대결하여 범인을 맞춰 보고 싶다, 아니면 반전이 있지만 논리를 바탕으로 흘러가는 추리소설을 보고 싶다 하면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자극적이고 고전에서 벗어난 느낌의 추리소설을 원한다면 이 책은 지루하게 느껴질 것 같다.
“스기시타 씨라고 하셨지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가즈오가 다시 머리를 숙이자 상대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데이트 장소로 선술집을 고르는 건 피하는 편이 좋겠군요. 여성은 더 로맨틱한 곳으로 데려가야지요. 처음부터 멋없는 남자로 찍히면 손해입니다.”
“아.”
뜬금없는 소리에 가즈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봐도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대목.
“하지만 사가시마씨.”
호시조노가 예의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고 나서 반박했다.
“이런 학설도 있었습니다. 태고의 바닷속 단백질에서 원시 생명체가 태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아아, 가드너의 원시 생명이 탄생할 확률 말이군요. 원형질 수프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원시 생명이 태어날 확률은 10의 40제곱분의 1이라는 그 가설.”
사가시마는 여전히 어두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사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지적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한 건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중에 관련 책을 찾아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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