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아리스가와 아리스 시리즈를 알게 된 건 2016년에 방영된 일본 드라마때문이었다. 중학생 시절 이후로 일드는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사실 유치한 맛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싶어 고쿠센 1탄은 재탕한 적이 있다.) 남x남 콤비의 케미로 밀고 나가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하니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가 튀어나왔다.
임상범죄학자가 대체 뭐지? 싶으면서도 제목에 들어간 '추리'라는 단어를 보아하니 내가 환장하는 추리물 + 브로맨스 장르일 것 같아서 바로 1화를 재생했다. 재생한 지 얼마 안 돼서 저예산 느낌이 물씬 나는 연출과 1n년 가까이 일본 연예인 덕질을 했어도 적응이 안 되는 일본식 스타일링 때문에 하차각이 날카롭게 섰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호게모이의 노예였다. 주인공 히무라와 아리스의 캐릭터성과 누가 봐도 노린 게 분명한 브로맨스는 나같은 추리호모 씹덕의 취향을 저격해버렸다.
공식 홈페이지 메인에 걸려있는 사진. 남자 둘 + 레드 + 장미. KTX 타고 지나가면서 봐도 BL 드라마 프로모션 이미지 같다(...)
드라마 얘기는 드라마 포스팅에서 더 길게 얘기해야겠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드라마를 통해 원작 추리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되었다. 추리소설도 환장하는 터라 국내에 발간된 시리즈는 모두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드라마의 원작은 아리스가와 아리스 시리즈 중 작가 아리스 쪽이었지만, 어차피 다 읽기로 한 거 학생 아리스 시리즈도 중고 서점 사이트에서 구해 읽기 시작했다.
[월광게임]은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다. 1988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얘기를 듣고 어느정도 낡은(?) 느낌이 날 거라 생각은 했다. 그래도 내 생각보다는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21세기와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큼지막한 핸드폰이나 테이프를 감아서 듣는 오디오 따위가 나올 때나 이 소설이 쓰여졌던 시기가 떠올랐다.
Nokia 7110. 오래되어 보이지만 사실 이 모델 발매일이 1999년이다!
학생 아리스의 장편 시리즈는 클로즈드 서클이 특징이다. [월광게임] 같은 경우 작품의 배경이 밀실이 되는 이유가 굉장히 다이나믹했다. 화산 폭발로 인한 밀실 살인사건이라니. 또다른 일본 추리소설인 “시인장 살인사건” 만큼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극단적인 설정으로 다가왔다. 화산 폭발이 일어나면 밀실이 되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 죽지 않을까?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소설은 에이토 대학의 추리소설 연구회 (EMC)의 부원인 화자 아리스가와 아리스, 부장 에가미 지로, 오다와 모치즈키가 캠핑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쌍두의 악마]를 먼저 읽었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파악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타대학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글을 읽는 내내 책의 맨 앞장에 있던 등장인물 안내를 읽어야만 했다. 웬만하면 등장인물이 많아도 헷갈리지 않는 편인데 (그것도 죄와 벌 같은 러시아 소설도 아니고 일본 소설이라면 더더욱) 월광게임은 유독 인물 구분이 어려웠다.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만큼 작가가 특징이 있는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범인을 유추하는 건 추리소설 보면서 추리는 하나도 염두에 두지 않는 나조차도 어렴풋이 예상 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범인의 동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이유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살인 동기는 개연성이 매우 떨어졌다. 그래도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만큼 숨기는 것 없이 정직하게 단서를 제공하여 독자들이 범인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게 한 부분은 좋았다.
구구절절 책에 대한 내용을 썼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작가 /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두 콤비의 케미를 보기 위해서였다. 돌려 말해서 케미지 사실 그냥 나의 불순한 욕망을 채우기 위한 떡밥을 위해서였다. [쌍두의 악마]에서도 에가미 부장과 아리스의 사이를 심상치 않게 느꼈는데 월광게임에서는 (씹덕의 눈에만 보이는) 그렇고 그런 장면들이 많이 나와서 읽는 내내 행복했다. 사실 리뷰를 쓰는 이유도 내가 웃음을 참지 못했던 부분들을 남기려고 하는 거니까... ㅎㅎㅎㅎ
“안녕히 주무셨어요?”
리요가 루미와 함께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부시다. 마치 지금 막 이슬에서 태어난 것처럼, 환상적이고도 신선했다.
그렇다, 오늘 아침은 확실히 새로 태어난 아침이다. 그녀를, 이 아름다운 생물을 알고 처음으로 맞이한 아침인 것이다. 잊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칫솔을 씹는 바람에 와작,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엄청 일찍 깼네, 아리스.”
“자리에 없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어.”
리요를 눈으로 쫓고 있는데 오다와 모치즈키가 말을 걸었다.
“이런 곳에 오면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이더라고요. 평소 같으면 열 시간이고 열두 시간이고 줄기차게 잘 텐데.”
적당히 대꾸하면서 다시 리요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강가에 웅크려 앉아, “우와! 차가워.”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씻고 있었다.
옆에서 들러붙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보자, 에가미 선배가 스윽 눈길을 떨어뜨렸다. 느낌이 좋지 않다. 여자 애를 넋 빠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들켰을 뿐이라면 별 상관없지만, 목격자인 에가미 선배가 민망하다는 듯 눈길을 돌린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아리스가 리요를 좋아하는 부분은 너무 귀여운데, 그걸 에가미가 훔쳐보고 있었다는 게 너무 웃기다. 귀여워하는 후배가 다른 여자애한테 홀딱 반한 걸 남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니...
“호오, 이건 난해한 사건이었군. 그래, 범인은?
모치즈키가 말했다. 스페이드 에이스는 에가미 선배의 손 안에 있었다. 술렁술렁. 믿을 수 없다. 에가미 선배는 마치 방관자 같은 무심한 모습으로 시체에서 가장 멀리, 7-8미터나 떨어진 사건 반경의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에가미 선배, 어떤 트릭을 쓴 거죠? 원거리 공격무기?”
모치즈키도 기가 막힌 모습이다. 에가미 선배는 태연한 얼굴로 “아무 것도.”라고 말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속에서 묘사되는 에가미는 장발 미남이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람들이랑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무심하게 묘사될 때마다 왠지 쿨뷰티가 생각나고 참 좋다ㅎ 근데 운동도 잘하고, 돈이 필요할 땐 육체 노동 알바를 뛴다는 것도 반전 포인트.
“에가미 선배.”
눈만 돌려 나를 바라본다.
“다들 뭐하고 있어? 도마에 오른 생선처럼 각오를 하고 있나?”
“에가미 선배는 그런 심경인가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때에 살인 사건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범인은 누구일 것 같아요? 거의 파악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아리스.” 부장은 턱을 긁적였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해도 곤란해. 초인적인 명탐정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범인을 알 수 있겠어?”
“……”
“우발적인 범행이겠지. 사소한 일로 다투다 그만 나이프를 빼들었을 거야. 조만간 범인도 자수할 거야.”
“……”
“구조대는 아직 더 있어야 올 거다. 그 사이에 범인도 정신을 차리겠지. 나는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해.”
“……”
“그보다 아리스.” 에가미 선배는 거기서 말을 끊더니 잠시 주저했다. “그 리요라는 아이 말인데.”
“넷?”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적당히. 알겠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뒤척여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나는 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 못하고, “하아.”라고만 대답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에가미가 아리스에게 왜 저렇게 얘기했던건지는 마지막 에필로그에 나오지만, 난 이때까지만해도 에가미가 질투한다고 생각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또 잔인한 말씀을 하시네요. 전부 듣고 있었어요?”
“리요가 샐리의 나이프를 발견해서 버린 이야기는 들었어. 하지만 너도 그렇게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목격해 놓고 입 다물고 있었으니 용서할 수가 없구나.”
“말씀 마세요.”
에가미 선배는 싱글싱글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리요도 상당하지만 아리스도 사서 걱정이다. 그 애가 나이프를 버리는 걸 봤다고 그게 바로 리요=범인이 되니? 단순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에가미는 아리스를 놀리는 재미에 사는 것 같다. 용서할 수 없다면서 싱글싱글 웃기는 왜 웃어.
“아리스, 미안하지만 안 돼. 나,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
발밑에서 함정이 입을 쩍 벌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
”안녕”
리요의 마지막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유리 너머의 그녀는 역시 쓸쓸해 보였다.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에가미 선배였다. 평소보다 한층 더 푸근한 그 눈동자는, 마치 실연의 신 같다. 이 사람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에가미는 100% 속으로 아리스 몰래 웃고 있었을 것이다.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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