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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s

외딴섬 퍼즐

스포일러 주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인 [외딴섬 퍼즐]. 시리즈의 히로인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마 마리아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마리아의 초대로 섬에 방문한 에가미와 아리스는 모아이 상과 얽인 퍼즐과 함께 세 건의 살인사건을 맞닥뜨리게 된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 추리의 ‘ㅊ’조차 신경쓰지 않고 읽는 나조차도 범인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등장인물 중 범인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트릭을 모르더라도 퍼즐에 얽힌 비밀과 과거의 살인 사건을 알게 되면 떠오르는 범인은 단 한 명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의 작품은 대부분 신본격의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반전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는다. 동기가 약하거나,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긴 해도 전혀 뜬금 없는 사건을 만들어 제시하지는 않는다.


    외딴섬 퍼즐도 기막힌 반전, 놀라운 트릭 이런 부분은 없지만 논리적인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추리를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데뷔작인 월광게임보다 훨씬 납득이 되는 동기와 밀실 배경을 설정했기 때문에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살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너무나도 평온한 사람들이 이해 안 된다는 리뷰를 봤었는데, 정작 책을 읽을 때는 그렇다는 생각이 딱히 들진 않았다.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지면 오히려 그 사건을 회피하거나 잊어버리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의 대화나 행동 속에서 알게 모르게 조성된 불안감이 나에게는 어느정도 전해졌다.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와 거리가 먼 얘기를 하자면 주인공 아리스가 마리아에 대해 묘사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월광게임]에서는 리요를 짝사랑해서 혼자 끙끙 앓고,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며 그녀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사람을 질투하고, 나중에는 그녀의 수상한 행동까지 모른 척 넘어가기까지 하던 찌질남이 객관적으로도 예쁘다고 묘사되는 마리아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니. 이런 게 바로 동족혐오(?) 같은 느낌일까. 아무리 예쁘고 성격 좋고 인기 많은 여자라고 해도 본인과 비슷한 미스터리 오타쿠라는 점에서 마리아는 탈락을 한 것일까... 리요만 봐도 아리스의 취향은 청순 혹은 조용한 미인일 것 같긴 하다. 후속작에서 아리스랑 마리아가 이어질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인 바람은 그냥 둘 다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리스는 에가미 부장이랑 연애를 해야하니까.

 


 

    소노베와 간고는 거실을 사이에 끼고 10년 전 이야기에 흥을 올렸다. 나는 때때로 “허어”니, “그러셨어요?” 하는 맞장구를 쳤고, 에가미 선배는 직소 퍼즐을 분류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사람은 직소 퍼즐에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한 번 시작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그런 점도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리스의 고백(1)

 

    거창한 표현이지만 나는 에가미 선배의 냉정함에 약간 감동했다. 머릿속은 지극히 명료한가 보다. 똑똑하고, 재주 많고, 터프한 이 사람이 어째서 대학교에서 몇 년째 유급하고 있을까? 이런 장면에서 내가 평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은 또다시 깊어졌다.

    아리스의 고백(2). 에가미의 유급 이유는 후속작 [쌍두의 악마]에서 나온다. 아리스의 눈에도 장발 미남 + 똑똑함 + 재주 많음 + 몸 좋음 + 터프함, 즉 모든 게 완벽하게 보일 정도면 분명 대학교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에가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많을 것 같다. 다가가기 어려운 타입이라 다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누가 마리아 아니랄까봐. 나도 노 찾는 거 도와줄게.”
    사토미가 남편에게 귀띔을 하자 도시유키마저 돕겠다고 나섰다. 이거 큰일 났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가미 선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렇게 대규모 수색대를 바다로 보낼 건 없습니다. 후배의 실수이니 저 혼자 돕겠습니다. 그래도 안되겠으면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잠깐, 선배 혼자 너무 멋지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되자 나는 안심했다. 자, 이제 노만 찾으면 된다. 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장의 한마디.
    “덜렁이.”
    …
    “에가미 선배, 제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죠?”
    마리아가 눈을 슬쩍 치뜨고 물었다.
    “아니, 전혀. 아, 너무 크게 웃어서 마음 상했어? 아니야, 아니야.”
    부장은 또다시 은근한 웃음을 띠고 있다.
    “그게 아니야. 두 사람이 얼빠진 대화를 해서 웃은 게 아냐. 그걸 곁에서 듣는 순간 마리아는 정말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내가 웃겨서 그래.”
    “그거 참 설득력 없게 달래시네요.”
    마리아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에가미가 후배 둘을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알 수 있는 장면. 다 큰 성인 남성한테는 덜렁이라고 하질 않나, 마리아는 실수를 감싸주면서 슬쩍 달래주질 않나. 아무래도 아리스가와는 에가미 지로라는 캐릭터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나보다.

 

    한밤중에 한 번 깼다. 몸을 뒤척이다 눈을 어렴풋이 떠 보니 에가미 선배는 깨어 있었다. 셔츠를 입은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지도를 바라보고 있다. 창에서 들어오는 별빛으로 심각한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피어오르는 보랏빛 연기가 마치 어둠 속에서 춤을 추듯 아름다웠다. 나는 말을 걸 수 없었다. 팽팽하게 긴장된, 섬세한 공기가 에가미 선배를 감싸고 있었기에.
    …
    다시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7시가 넘었다. 에가미 선배는 깨어 있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담배꽁초가 넘쳐 나는 재떨이와 구겨진 캐빈 상자가 있었다. 일단 아침 인사를 했지만 부장은 ‘어’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또 퍼즐이에요? 어젯밤에도 일어나서 고민하고 있었죠?”
    “응? 그냥. 너, 보고 있었어?”
    “아뇨.”
    거짓말을 했다.
    “그냥 캐빈 상자가 텅 비어 있기에 깨어 있을 줄 알았죠.”

    왠지 모르게 섹텐이 느껴지는 장면. 아리스가 몰래 훔쳐보는 에가미의 진지한 모습이 섹시하다. 아니 근데 왜 몰래 본 걸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리스는. 자기도 뭐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겠지? 부장을 보고 사랑을 느꼈나?

 

    “류이치 씨에게 일생을 바치기 위해 당신은 당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에가미 선배가 분을 터뜨렸다.
    “그리고 제가 내세우는 종이보다 얄팍한 논리를 전부 부정하고 웃어넘겼어야 했습니다.”
    스포일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에가미 선배는 어째서 스포일러 앞에서 범죄를 폭로한 것일까? 에가미 선배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일도 없었을 텐데, 어째서?
    “저는 당신을 고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아까 당신의 얼굴을 본 순간,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실을 견딜 수 있을지 너무나 걱정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라는 목격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이제 곧 경찰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 겁니다. 당신은 가혹한 수사를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당신은 그것도 견뎌 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하잘 것 없는 저의, 종이보다 얄팍한, 당신이 떨어뜨린 그 종이 한 장보다 얄팍한 논리 하나 되받아치지 못했던 겁니까?”

    에가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사. 사람들을 모아놓고 범인을 추리해내는 탐정도 멋있지만, 범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탐정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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